| “1921년의 환대에서 공간과 제도 개선, 그리고 공존으로…” ■ ‘고려인 강제이주 90주년 추진위원회 출범’ 기념 특집 ① 미션21 phj2930@nate.com |
| 2026년 10월 22일(목) 1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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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 끝 조상의 땅으로 돌아온 이들이 이룬 고려인 마을, 민간의 헌신으로 일궈
이제 국적, 노동·복지, 교육, 가족결합 뒷받침 법·제도적 기반 함께 마련돼야
카자흐 - 한국국제포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서 역사적 기억과 평화연대 모색
광주와 중앙아, 세계 한민족 디아스포라 연결 ‘국제 문화교류 관문’성장 기대
1921년 5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한인 학생음악단이 열차를 타고 광주 송정리역에 도착했다. 남자 7명과 여자 4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연해주에 정착한 조선인 후예들이었다. 광주에서는 최흥종을 비롯한 지역 인사들이 역으로 나가 이들을 맞았다. 음악단을 광주로 초청한 단체는 최흥종이 이끌던 광주청년회였다.
이들의 광주 방문은 단순한 순회공연이 아니었다. 나라를 잃고 연해주로 떠났던 한인 동포들이 음악을 통해 모국과 만난 자리였다. 광주 시민들은 낯선 북방에서 찾아온 동포들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았고, 광주에 머무는 동안 필요한 숙식비도 부담했다. 음악은 바다와 국경을 넘어 흩어진 민족을 다시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
당시 광주와 연해주 사이에는 이미 심리적 유대감과 의미 있는 교류가 형성돼 있었다. 특히 최흥종은 연해주 동포음악단을 초청하고 환대하는 일에 앞장섰다. 고난받는 이웃과 민족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았던 그의 삶은 광주가 오래전부터 간직해 온 환대와 연대의 정신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105년이 흐른 2026 광주국제평화연극제 폐막작 ‘유산’은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의 비극을 무대 위에 되살렸다. /글=이박행 본지 주필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오늘, 연해주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돌아온 고려인 동포들이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광산구 월곡동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한 세기 전 광주가 연해주 한인 청년들을 맞이했던 역사는 오늘의 월곡동 고려인마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유랑을 마치고 조상의 땅으로
고려인의 역사는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겪은 대표적인 비극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많은 한인이 생존을 위해, 또는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 약 17만2천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고려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화물열차에 실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낯선 땅으로 옮겨졌다. 수많은 사람이 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황무지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삶의 터전을 만들고, 우리말과 음식, 노래와 춤을 지키며 민족적 정체성을 이어왔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고려인 후손들의 대한민국 이주가 본격화됐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광산구 월곡동 일대에 정착하면서 국내를 대표하는 고려인마을이 형성됐다. 현재 월곡동과 인근 지역에는 약 5천 명의 고려인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어 간판이 늘어서고 중앙아시아 음식점과 식료품점, 여행사와 직업소개소 등이 들어선 월곡동은 독특한 생활문화 공간으로 성장했다. 이곳은 고려인들이 낯선 조국에서 서로 의지하며 삶의 기반을 마련한 정착 공동체이자, 전남광주통합특별시가 중앙아시아와 세계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만나는 국제적인 창구다.
민간의 헌신으로 일군 고려인마을
월곡동에는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를 비롯해 월곡고려인문화관 ‘결’, 고려인광주진료소, 노인돌봄센터, 청소년문화센터, 미디어센터 등 여러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종합상담과 한국어교육, 의료지원과 노인복지, 아동·청소년 돌봄, 문화예술교육과 오케스트라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월곡고려인문화관 ‘결’은 강제이주와 중앙아시아 정착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물과 사진, 생활유물 등 1만2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고려인마을 공공미술 거리와 홍범도공원, 주민관광청, 마을미술관 등도 조성돼 역사교육과 문화관광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고려인 주민과 지역 시민사회, 종교계와 후원자들의 오랜 헌신으로 가능했다. 광주의 고려인마을은 처음부터 국가나 지방정부가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조성한 공간이 아니었다. 어려움에 처한 동포를 외면할 수 없다는 시민들의 마음과 자발적인 나눔이 쌓여 오늘의 마을을 이뤘다.
그러나 주민 규모가 커지고 세대와 생활환경이 다양해지면서 기존의 분산된 시설과 민간단체의 노력만으로는 증가하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상담과 교육, 의료와 돌봄, 문화사업이 마을 곳곳의 서로 다른 공간에서 운영되고 있어 주민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한 번에 안내받고 이용하기 어렵다. 공간 부족과 전문인력, 안정적인 운영재정의 한계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존 시설을 없애거나 대체하는 새로운 건물이 아니다. 마을 곳곳에 축적된 시설과 활동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민간의 헌신 위에 공공성과 전문성을 더하는 통합적인 거점이다.
환대는 공간과 제도가 돼야 한다
1921년 광주는 연해주에서 찾아온 한인 청년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시민들은 이들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고, 정성을 모아 숙식을 제공했다. 한 세기 전의 환대가 아름다운 미담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이제 그 환대는 공간과 제도가 돼야 한다. 고려인마을 복합센터는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는 역사문화 공간이자 오늘의 삶을 돌보는 생활복지 거점이며, 다음 세대의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공간이 돼야 한다. 나아가 광주와 중앙아시아, 세계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연결하는 국제 문화교류의 관문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물리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만으로 고려인 동포의 안정적인 정착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복합센터가 주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려면 체류와 국적, 노동과 복지, 교육과 가족결합을 뒷받침하는 법적·제도적 기반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
이제 국적, 노동·복지, 교육, 가족결합 뒷받침 법·제도적 기반 함께 마련돼야
카자흐 - 한국국제포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서 역사적 기억과 평화연대 모색
광주와 중앙아, 세계 한민족 디아스포라 연결 ‘국제 문화교류 관문’성장 기대
1921년 5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한인 학생음악단이 열차를 타고 광주 송정리역에 도착했다. 남자 7명과 여자 4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연해주에 정착한 조선인 후예들이었다. 광주에서는 최흥종을 비롯한 지역 인사들이 역으로 나가 이들을 맞았다. 음악단을 광주로 초청한 단체는 최흥종이 이끌던 광주청년회였다.
이들의 광주 방문은 단순한 순회공연이 아니었다. 나라를 잃고 연해주로 떠났던 한인 동포들이 음악을 통해 모국과 만난 자리였다. 광주 시민들은 낯선 북방에서 찾아온 동포들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았고, 광주에 머무는 동안 필요한 숙식비도 부담했다. 음악은 바다와 국경을 넘어 흩어진 민족을 다시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
당시 광주와 연해주 사이에는 이미 심리적 유대감과 의미 있는 교류가 형성돼 있었다. 특히 최흥종은 연해주 동포음악단을 초청하고 환대하는 일에 앞장섰다. 고난받는 이웃과 민족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았던 그의 삶은 광주가 오래전부터 간직해 온 환대와 연대의 정신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105년이 흐른 2026 광주국제평화연극제 폐막작 ‘유산’은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의 비극을 무대 위에 되살렸다. /글=이박행 본지 주필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오늘, 연해주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돌아온 고려인 동포들이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광산구 월곡동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한 세기 전 광주가 연해주 한인 청년들을 맞이했던 역사는 오늘의 월곡동 고려인마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유랑을 마치고 조상의 땅으로
고려인의 역사는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겪은 대표적인 비극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많은 한인이 생존을 위해, 또는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 약 17만2천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고려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화물열차에 실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낯선 땅으로 옮겨졌다. 수많은 사람이 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황무지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삶의 터전을 만들고, 우리말과 음식, 노래와 춤을 지키며 민족적 정체성을 이어왔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고려인 후손들의 대한민국 이주가 본격화됐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광산구 월곡동 일대에 정착하면서 국내를 대표하는 고려인마을이 형성됐다. 현재 월곡동과 인근 지역에는 약 5천 명의 고려인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어 간판이 늘어서고 중앙아시아 음식점과 식료품점, 여행사와 직업소개소 등이 들어선 월곡동은 독특한 생활문화 공간으로 성장했다. 이곳은 고려인들이 낯선 조국에서 서로 의지하며 삶의 기반을 마련한 정착 공동체이자, 전남광주통합특별시가 중앙아시아와 세계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만나는 국제적인 창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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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의 헌신으로 일군 고려인마을
월곡동에는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를 비롯해 월곡고려인문화관 ‘결’, 고려인광주진료소, 노인돌봄센터, 청소년문화센터, 미디어센터 등 여러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종합상담과 한국어교육, 의료지원과 노인복지, 아동·청소년 돌봄, 문화예술교육과 오케스트라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월곡고려인문화관 ‘결’은 강제이주와 중앙아시아 정착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물과 사진, 생활유물 등 1만2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고려인마을 공공미술 거리와 홍범도공원, 주민관광청, 마을미술관 등도 조성돼 역사교육과 문화관광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고려인 주민과 지역 시민사회, 종교계와 후원자들의 오랜 헌신으로 가능했다. 광주의 고려인마을은 처음부터 국가나 지방정부가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조성한 공간이 아니었다. 어려움에 처한 동포를 외면할 수 없다는 시민들의 마음과 자발적인 나눔이 쌓여 오늘의 마을을 이뤘다.
그러나 주민 규모가 커지고 세대와 생활환경이 다양해지면서 기존의 분산된 시설과 민간단체의 노력만으로는 증가하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상담과 교육, 의료와 돌봄, 문화사업이 마을 곳곳의 서로 다른 공간에서 운영되고 있어 주민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한 번에 안내받고 이용하기 어렵다. 공간 부족과 전문인력, 안정적인 운영재정의 한계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존 시설을 없애거나 대체하는 새로운 건물이 아니다. 마을 곳곳에 축적된 시설과 활동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민간의 헌신 위에 공공성과 전문성을 더하는 통합적인 거점이다.
환대는 공간과 제도가 돼야 한다
1921년 광주는 연해주에서 찾아온 한인 청년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시민들은 이들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고, 정성을 모아 숙식을 제공했다. 한 세기 전의 환대가 아름다운 미담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이제 그 환대는 공간과 제도가 돼야 한다. 고려인마을 복합센터는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는 역사문화 공간이자 오늘의 삶을 돌보는 생활복지 거점이며, 다음 세대의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공간이 돼야 한다. 나아가 광주와 중앙아시아, 세계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연결하는 국제 문화교류의 관문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물리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만으로 고려인 동포의 안정적인 정착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복합센터가 주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려면 체류와 국적, 노동과 복지, 교육과 가족결합을 뒷받침하는 법적·제도적 기반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
미션21 phj2930@nate.com

2026.10.22(목) 14:31
















